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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달의 연대기 - 하늘과 별의 사이 3 [작가 정지오]
작성자 일병정지오 작성일 2018-03-18 02:05 조회수 672


저자 | 정지오

달의 연대기 - 하늘과 별의 사이 3


 이게 포도주인지 말 오줌인지 모르겠다.

아롈은 머금은 술을 두어 번 굴리다 삼켰다. 산지인 남쪽에서도 같은 무게의 금만큼 비싸다는 최고급 샤토 브리앙 산이었지만, 맛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라곤 남아있질 않았다. 이성은 어딘가로 도망쳤는데 몸은 익숙하게 예법에 따라 잔을 내려놓았다.

입이 깔깔한 것이 그냥 거르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석찬이었다. 평소라면 음식을 손톱 끝만큼 받아다 한 입에 서른 번씩 씹어가며 시간을 때웠겠지만 하필 오늘은 남쪽의 손님들을 배려한답시고 남부식으로 차렸다.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식탁에 가득 차려두고 하인이 약간씩 덜어주면 먹는 북부식과 달리 남부식은 개인접시가 계속 나온다. 정해진 양의 음식을 깨끗이 먹어치우지 않는 것은 상당한 결례였다.

만찬을 준비한 여주인이 모욕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나 다른 나라 사람 앞에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남쪽에서 계속 볼 사람들이었다. 아예 나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자리에 앉은 이상 깨끗이 먹어치워야 했다.

입맛을 돋우는 아뮤즈 부쉬로 나온 레몬즙과 수란은 그래도 한 입 거리였다. 버터를 듬뿍 발라 구운 빵도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주방장이 대단히 공들인 게 틀림없는 게살 수프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첫 번째 앙트레인 버섯과 전복 요리에 이르러서는 이게 군화 바닥인지 부드럽게 소테한 전복인지 알 길이 없었다.

모름지기 황실의 정식 석찬이라 하면 전채, 생선, 고기를 종류를 바꿔 세 바퀴쯤 돌고 나야 치즈와 후식이 나오는 것이 정석이었다. 아무리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나오는 음식이라도 그만큼 먹으면 터질 것 같은 배를 붙잡고 헉헉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이 몸 상태로는 나가서 전부 게우고 와 마저 식사를 해야 할 듯했다.

어릴 적부터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항상 몸이 아팠다. 지금 아롈의 몸상태를 악화시킨 주범은 다름이 아니라 식탁 끝에 앉아있는 여제였다.

그녀는 아까 그 경멸의 말만을 남긴 채 당당히 문을 열고 걸어 나갔고,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사흘 굶은 불곰이 먹이를 발견한 듯 달려들어 아롈을 씻겼다.

평소에는 열두 명 중 반만 시중을 들며 교대했지만 이번엔 시간이 없답시고 전부 달라붙어 뚝딱거린 끝에 겨우 여섯 시간 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렇게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석찬을 드는데 새벽이 아니라 정오가 넘겨서 몸치장을 시작하다니. 평생 굳어온 상식이 오늘 설탕과자처럼 깨진다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우물거리던 전복을 꿀떡 넘기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자 시종들이 재빨리 접시를 치우고 새로운 식기를 가져다 놓았다. 다음 접시를 기다리는 틈을 타 맞은편에 자리 잡은 로렌의 대사가 입을 열었다.

"훌륭한 대접에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오늘의 전복은 본국에서도 맛보기 힘들 만큼 훌륭하더군요."

대사는 그럭저럭 훌륭한 페란토를 구사했다. 통역을 거치지 않고 그가 직접 페란토를 사용한다는 건 이 식사가 '공식적인 외교 절차'가 아님을 의미했다.

나붓이 접혔다 펴지는 입가의 주름. 여제는 대단히 흡족한 얼굴로 웃고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식사 한 끼에 무슨 감사랄 것이 있겠소. 그저 이 혼사가 신의 이름 아래 이루어져 양국의 평화, 나아가 대륙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 짐이 원하는 유일한 바요."

"그런 말씀은 데세르까지는 나온 다음 해주시지요. 아직 생선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 대륙 평화라니,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머나, 내가 주책없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소?"

재치 있는 대사의 대답에 입을 가리고 깔깔 웃는 그녀는 꼭 아롈의 젊음을 앗아간 듯 싱그러운 소녀 같았다.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늘어진 금팔찌가 찰랑였다.

다음 접시는 송어였다.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잘 익혔고 곁들인 아스파라거스와도 잘 어울렸다. 그에 맞춰 바뀐 백포도주와 같이 먹으니 그래도 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롈이 생선 접시에 신경을 쏟는 사이, 대사와 여제는 웃음을 안주로 술잔을 기울였고 이내 폐하와 대사 대신 고모님과 필리프로 서로를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아롈은 무심한 눈으로 늙은 대사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애쓰시는군, 몇십 년을 안 본 여자에게 대번에 고모님이라니. 냉소 한 문장이 **을 스쳐지나갔다.

대사의 작위는 보르디 대공자, 샤를루아 공작으로 여제의 오라비의 아들이자 아롈의 사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북쪽까지 올 일은 커녕 남부 바깥으로는 나갈 일조차 없었으리라. 그의 신분만 봐도 양국에서 이 혼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 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곁에 앉아있는 총영사는 어떤가.

아롈이 흘끗 눈길을 주자 총영사는 가볍게 눈을 내리깔아 예를 표했다. 오를레앙 대공자라고 했던가. 오를레앙이라면 현 로렌의 황후인 마르그리트 안의 가문이며 보르디와 함께 로렌의 여섯 대공가의 하나였다. 그는 아롈의 남편될 사람과 이종사촌이라고 했다. 대공가 출신을 여자 하나 마중 나오라고 둘이나 딸려 보내다니, 그것도 둘 다 후계자였다. 여행길에 객사라도 하면 어쩌려고, 정말이지 겁 없기도 하지. 하긴 사생아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발정 난 동네니 자식이 귀할까.

빈정거리는 마음과는 별개로 총영사는 대단히 잘생겨서 눈요기로는 쓸 만했다. 반짝이는 눈과 반듯한 콧날이 예사롭지 않은 걸 봐선 약혼녀 속 깨나 썩였을 듯 했다. 무도회에서 인물이 좀 반반하다 싶은 인물을 관찰하면 어김없이 여인네의 손을 잡고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생선 접시가 나가고 양갈비가 나왔다. 칼로 썰어보니 속살은 진한 분홍빛이었다. 양 특유의 냄새를 감추려 민트 젤리를 듬뿍 발라 씹어 삼켰다. 딱히 볼 것이 없어 계속 뚫어져라 외모를 감상했는데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나보다.

오를레앙 대공자는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혹여 묻고픈 것이 있으십니까, 마담 라 세르?"

아롈은 아주 잠시 제 표정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다.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상대방이 알아차렸다면 그 자체로 치명적이었다. 담소를 나누던 대사와 여제까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며 웃어 보이면서도 배에 칼을 찔러 넣은 느낌이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혼식은 사흘 뒤입니다만. 총영사께서는 성격이 다소 급하시군요."

아무렇지 않은 척 찬물을 들이키면서도 심장이 쾅쾅 뛰었다. 바보 같은 옐레나 파블로브나. 역시 파블로브나인 게 문제였다. 천치 같은 피.

총영사는 가만히 웃었다.

"굳이 총영사라 딱딱하게 칭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시집오시면 혈연으로 묶이게 될 사이 아닙니까. 부디 전하께서도 편하게 미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미셸?"

그가 짧게 웃었다. 아롈은 그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가 다시 소개한 이름은 장 미셸 루이 프랑수아 ?로?를?레?앙?(?l?'?O?r?l?e?a?n?s?)?이?었?다?.? 하필 고르고 골라 미셸이라. 아롈이 잠시 침묵하는 틈을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와 여제가 입을 열었다.

"오를레앙 대공자도 미셸이라고 불리는가?"

"그러합니다, 폐하."

"알다시피 내 아들의 이름도 미하일이오. 미셸은 남부에서는 드물게 쓰는 이름인 걸 아오. 그런 이름을 가진 대공자가 이 먼 곳에 온 것이 어찌 우연이겠소."

"폐하의 아드님과 이름이 같다니, 영광입니다."

그래,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강보에 싸여 유모의 *을 먹고 있을 미하일 파블로비치를 떠올리자 급작스레 신물이 올라왔다.

여제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자, 축배를 듭시다. 이 만남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에 경배를!"

"경배를."

식탁에 앉은 사람은 넷뿐인데 건배사는 주위에 빙 둘러선 시종과 시녀들이 동시에 외쳤다. 아롈은 포도주를 입술에만 적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대사는 신이 나서 총영사와 함께 여제에게 아양을 떨어댔고, 아롈은 양고기를 씹지도 않고 삼켰다.

사흘 뒤, 사흘 뒤에 저 대사와 함께 식장에 들어간다.

큰 고깃덩어리가 목구멍을 찢을 듯 걸렸다.

 

만찬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정신이 다 너덜거렸다. 어찌나 피곤한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밤새 연회에서 먹고 마시며 놀다가 새벽에 들어가 서류와 씨름한 적도 많건만, 어째 꾸역꾸역 먹기만 하면서 보낸 지금이 열 배쯤은 힘들었다. 아롈이 만찬에 참석한 건 연금에서 풀려난 후 처음이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이놈의 몸뚱이는 털끝만큼만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위로 게우거나 배탈이 나서 밤새 고생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롈은 방으로 돌***라 생각한 동시에 스스로 방을 다 때려부수고 나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곁방에서 치장하는 동안 방을 좀 치워두지 않았을까. 치장하는 데 여섯 시간, 만찬에 세 시간. 이렇게 아홉 시간이면 그래도 사람이 잠들만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오늘은 손님용 방에서 시간을 때워야 하나? 몸도 이 모양인데 잠자리가 바뀌면 또 한숨도 못 잘 텐데.

뜻한 대로 ** 않으니 급작스레 신경질이 났다. 아롈은 힘주어 바닥을 디디다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아찔하다 싶은 순간 누가 아롈을 부축했다. 어련히 근위대 병사일까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거기엔 반반한 얼굴이 있었다. 아롈은 팔을 거두었다.

"고맙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전하."

"내게도 호위는 넘칠 만큼 있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리무쟁 공작. 공작은 스스로가 코시카의 근위대 장교들보다 낫다 자부하는 겁니까?"

아롈이라면 무안해서 돌아**도 않고 자리를 뜰 만큼 쌀쌀맞은 거절이었는데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다. 이립(而立)도 되지 않은 주제에 불혹을 넘긴 나이처럼 구는 것이 같잖았다.

미셸은 상냥하게 덧붙였다.

"북쪽의 기사들을 폄하하여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관대한 마음으로 제 불안한 속내를 품어주십시오."

아랫배가 심술로 꿈틀거렸다. 아니,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아롈은 지금 트집을 잡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해졌을까.

"바람이라도 쐴까요? 정원으로 나가지요."

"기꺼이."

현관으로 나가기 전 아롈은 새 시녀장인 레르몬토프 백작부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뱀 같은 여자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원래 아롈을 모시던 시녀들은 둘을 빼고 모두.

"자네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취침 차비를 해놓게."

그녀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롈은 뒤로 돌아 걸었다. 아무래도 요강과의 대면은 좀 미루어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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