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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달의 연대기 - 하늘과 별의 사이 2 [작가 정지오]
작성자 이등병정지오 작성일 2018-03-18 01:31 조회수 753


저자 | 정지오

달의 연대기 - 하늘과 별의 사이 2


 이제 좀 조용해졌다.

아롈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부터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한 올이 신경 쓰였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어 떼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기함을 할 일이었다. 명색이 ?체?사?레?브?나?-?코?시?카?의? 제1계승권자의 비, 혹은 여성인 제1계승권자-였던 여대공의 방이 반역이라도 일어난 듯 엉망진창이었으니. 성한 가구며 장식품이 단 한 개도 없었다. 깨지고 뒤집히고 부서지고 얼룩지고 뜯어졌다. 심지어 그 주인조차 성한 몰골이 아니었다.

허리를 **매는 코르셋과 드레스 대신 낙낙한 전통 원피스인 사라판과 루바쉬까-셔츠의 일종-만을 걸쳤다. 아침에 시녀들이 단정히 빗겨놓은 긴 머리는 산발이었고, 분칠한 얼굴은 수건으로 박박 닦아버려 얼룩덜룩했다.

사흘 뒤 결혼하는 새신부가 방을 다 때려 부수고 바닥에 추레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누가 봐도 ** 여자 같겠구나 싶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대리 신랑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남쪽에서 올라온 로렌 대사가 보면 파혼장을 날려줄지도 모른다. 광인을 제 나라의 태자비로 올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

원래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열심히 화장을 고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롈은 방에 돌아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시녀들이 문을 두드리며 제발 열어 주십사 애원했지만 절대 열어주지 않았다. 문을 부수자는 소리까지 나왔으나 그랬다간 목을 맬 테니 두고 보라고 악을 쓰자 이내 무산되었다.

얼마 전 새로 물갈이된 시녀들은 어머니의 충견들로, 아롈이 혼인식을 무사히 치를 때까지 손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혹여 아롈이 정말 목을 맨다면 그들은 물론 그들의 가**지 교수대에 매달릴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문 앞에서 농성을 하다가 하나 둘씩 떠나갔다. 아마 어머니에게 모든 일을 일러바치러 갔을 것이다.

뭐라고 고했을까? 여대공 전하께서 미쳤다고 했을까? 아니면 예의를 차려서 계승권을 빼앗긴 충격에 *어 판단력이 흐려지신 것 같다고 돌려 말했을까?

그래, 계승권.

오늘 아침 아롈은 자신과 자신의 모든 후손이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은 불덩이가 든 듯 뜨거웠고 아랫배는 누가 칼을 박아 넣은 것처럼 아려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신에게 기도했다. 사실 그 상황만 모면하게 해준다면 신이 아니라 유황불에서 뛰쳐나온 악마라도 상관없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성서에 손을 얹고 읊은 맹세가 끝나고 날개가 새겨진 은촉이 '코시카의 여대공, 옐레나 파블로브나 키예나'라는 글자를 그려낼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렐은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코시카의 제위에 오를 수 없었다. 나라의 모든 공작, 공, 다른 나라의 대사, 정교회의 총주교, 그리고 여제가 보는 앞에서 선언한 맹세였다. 빙하에 묻힌 전설 속의 폭룡이라도 불러내 그 모두를 꽁꽁 얼려버리지 않는 이상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차라리 나라를 하나 세우는 것이 쉬우리라.

그에 대해 솟아난 분노와 난생 처음 느끼는 격정이 아롈을 지배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모양이었다. '행동하라, 다만 냉정해라.' ?가?언?(?家?言?)?이?었?다?.?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곤 말하지 못해도 이리 이성이 없는 듯 군 적은 없었건만. 어이가 없었다.

알렉산드르가 나탈리야와 도망쳤을 때에도, 파블 1세가 정부와 정식결혼을 하고 사생아들에게 황위 계승권을 주겠다며 설쳤을 때에도, 심지어 어머니에게 어이없이 황위를 빼앗겼을 때에도 이러지 않았는데. 황위를 빼앗기고,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여제 폐하'라고 말하고 나서도 이리 숨이 붙어있지 않나. 정말 팔려가듯 남쪽에 시집가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하려 애썼는데.

자괴감마저 들었다. 결국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쪽이 **한 파블 1세의 것이라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진 거라고 세상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내 감정에 심취해 이성을 잃은 것이? 내가 파블로브나라서? 알렉산드르가 나탈리야를 선택한 것도 그가 파블로비치라서 그랬던 걸까?

어차피 결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끝나고 돌이켜보면 전말이 체스 판을 들여다보듯 환했다.

어머니가 반정에 필요한 군사를 어디서 구했을까. 코시카는 폐주의 일 이후, 엄격히 귀족의 사병 소유를 금하고 있었고, 황궁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 장교들은 아롈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거의 20년 가까이 로렌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해도 군권은 또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친정은 세상에 단 둘 뿐인 제국 중 나머지 하나인 로렌의 보르디였고, 로렌의 세르-로렌의 제1계승권자-는 아내와 사별한 후 광부(曠夫)의 신세였다.

아롈은 어제까지도 갓난아기인 미하일 다음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질적인 ?추?정?황?위?계?승?자?였?다?.? 정통성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 군사를 받고 딸을 팔아치운다. 좋은 거래였다. 자기 일만 아니었다면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머리로는 납득하고 있었다. 이 결혼은 진 자가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몫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벌. 아롈은 근위대를 장악하고 북부의 모든 나라들에게 협조 서신을 보내는 동안 바다를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무려 이천 명이라는 병력이 황도로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만도 감사해야할 판이었다.

연금당한 육 개월 동안 치욕을 곱씹으면서도 자결하지 않았을 때 이미 이 길로 들어섰다. 오히려 체면은 살려주는 자리라 감사해야 마땅했다.

그걸 전부 아는데, 분명히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롈은 자문했다.

대체 왜 이렇게 절망스러울까.

답은 신기할 정도로 금방 떠올랐다.

아무것도 몰라서.

지금까지는 항상 뭘 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비록 아주 좁고, 의무로 가득 찬 무거운 길이긴 했으나 그 방향만큼은 명확했다.

처음에는 황제의 손녀로서 교양을 쌓아 좋은 혼처로 시집갈 것, 알렉산드르가 도망친 다음에는 그를 대신해 황제가 될 것.

후계자인 큰딸이 남자와 야반도주 한 이후 황위계승법까지 갈아치운 조부는 자신의 바로 다음 대에 여제가 설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그렇게 아끼던 알렉산드르보다 자기가 더 나은 선택이라는 걸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샜는지, 눈에 실핏줄이 터지도록 생각하고 연구하고 책을 읽었는지.

그런데 계승권을 빼앗긴 지금 아롈은 다시 8년의 세월을 되돌아가 갈림길의 반대편에 팽개쳐졌다. 가**길을 헤치며 발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아랑곳않고 달렸건만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던 편한 길에 섰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부 잊어버렸는데 다시 그 길을 가라고 강요받았다.

아니, 그걸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쪽이라니. 스칸디아, 웨데나, 리투아니아, 하다못해 작센 같은 수많은 북부와 중부의 나라들을 두고 남쪽의 로렌이라니. 아롈은 코시카의 여대공이었고, 북쪽에서 평생을 살***라 믿었다. 중부도 아닌 남쪽은 꿈에서도 떠올려본 적이 없어 그 나라의 말에 대한 공부도 등한시했다.

그 동네의 생리는 어떤지, 그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지. 하다못해 날씨도 몰라서.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서.

영롱한 햇살이 눈을 찌를 듯 쏟아졌다. 패악을 부리며 커튼을 다 뜯어낸 탓이었다. 아롈은 무거운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깜깜하기만 했다. 이 어둠이 앞으로의 미래다 싶어 답답했다.

아롈은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자고 싶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꾸며도 석찬에 참석하긴 그른 일이었으니.

잠이 쏟아졌다. 억울했다. 어릴 적엔 그렇게 애를 써도 잠들지 못 한 날이 수두룩했는데 고작 황위 하나 빼앗겼다고 불면증이 기면증으로 둔갑한 양 잠이 쏟아지는 걸 보면.

그래, 고작 황위일 뿐이다. 고작. 처음부터 자신의 것도 아니었던.

이내 소녀는 깜빡 잠에 들었다. 아주 얇고 보드레한 풋잠이었다. 희끄무레하게 사람을 닮은 곰인지 곰을 닮은 사람인지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사샤.

옆에서 유리 밟는 소리가 났다. 없던 인기척이 갑자기 나타났다. 꿈결은 여지없이 찢겼고, 아롈의 정신은 금세 안개가 걷힌 듯 또렷해졌다.

누구의 인기척인가는 뻔했다. 문은 단단히 걸어잠갔고 여기는 5층이라 창문으로도 드나들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린 목소리는 잘 세공한 보석처럼 가다듬어져 있었다. 옐레나 1세는 동명(同名)의 딸에게 일갈했다.

"가관이로구나."

아롈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갑자기 눈을 찌르는 햇살 때문에 눈앞에 색색의 반점이 떠다녔다. 따갑다. 아주. 손으로 눈을 덮고 고개를 푹 숙이자 머리카락과 함께 정신까지 쏟아진 듯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빈정대는 말투도 같이 엎어졌다.

"존엄하신 폐하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이신지."

"이 무슨 같잖은 행동이냐."

"송구합니다. 딸은 모름지기 어미에게서 행동을 본받는 법. 소녀가 배운 것이 없어 이러하오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지요."

여제는 기가 찬 듯 한숨을 내뱉었다. 아롈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무 우스워서 입가가 간질거렸다. 그래서 어쩔 텐가? 당장 사흘 뒤가 혼인식인데 목이라도 치시려고? 당장 도망칠까봐 시녀를 전원 갈아치우고 방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근위대를 소대 단위로 붙이고, 체사레브나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던 회랑의 사용권마저 앗았으면서?

진한 녹색 눈이 노기를 띠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방자한 지는 네 스스로 알 것이다."

"아무렴 남편을 죽인 아내, 딸의 자리를 강탈한 어미보다 더 하겠습니까?"

여제의 가장 아픈 곳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여리고 공격하기 쉬운 부분. 그 곳을 돌려 말하지도 않고 정통으로 후벼 팠으니 조금은 타격이 있을 줄 알았건만. 옐레나 여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쳤다.

"아내에게 죽은 남편, 어미에게 자리 뺏긴 딸이 보고 배운 것이 없어 그리 했겠지."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불참은 용납하지 않겠다. 지금이라도 치장하고 나와라."

"싫습니다."

여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롈의 금발과, 녹안과, 이목구비는 모두 여제를 빼닮았다. 부정할 수 없는 혈연의 증거.

"그럼, 그 때 죽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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