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97주년 삼일절 | |||||
작성자 | 소위1왕킹무적xm | 작성일 | 2016-03-01 09:36 | 조회수 |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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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의미 1910년, 일본은 한국의 모든 주권을 빼앗고 경제를 장악하여 한국을 일본의 노예로 만들었다 국민들에게는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자유마저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을 일본사람으로 만들어 심부름꾼으로 사용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을 되찻으려고 노력하거나 일본을 반대하는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체포하고 고문을 했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과 갖은 압박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과 일본에 대한 저항 은 3.1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한 학생의 독랍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우렁찬 만세 소리는 일본이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져갔다. 당시 유관순 열사는 만세운동으로 학교(이화학당)이 문을 닫자 고향인 충남 천원군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곳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재판장에 끌려가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제판에서"나는 조선 사람이다.너희들이 우리땅에 와서 죄 없는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였으니,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그런 너희가 어찌 나를 재판 하겠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수작은 집어 치워라!" 이런식으로 주장하다가 7년의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에 같혀서도 계속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인 간수의 보진 고문을 받았고, 그로인해 결국 유관순열사는 굶주림과 병으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가 1920년으로 유관순 열사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3학년 정도의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 처럼 일본은 어린(?) 학생에게 뿐만 아니라,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던 만세운도을 총과 칼로 진압하여 수만 명 의 목숨을 앗아가고, 약10만 여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그 당시 재판을 받은 사람만도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 댓글에 남겨주시면 수정 하겠습니다^^ |